세시연에서는 <역지사지 공존형토론 수업교재>를 개발하였다. 이 교재의 근본이 바로 독일 보이텔스바흐 합의라고 할 수 있다. 이번 해 민주시민교육 해외교육편에서 독일의 민주시민교육의 실천이 바로 이 보이텔스 바흐 합의에 기반을 두고 있다. .........................................................................................................................
독일 민주시민교육의 사회적 합의와 교육현장 실천 현황독일의 민주시민교육에서 중요한 기준으로 자리 잡은 것이 ‘보이텔스바흐 합의(Beutelsbacher Konsens)’이다. 이 합의는 정치적·사회적 쟁점에 대한 하나의 결론을 제시하기보다, 정치교육에서 학생의 자율적인 판단을 보장하기 위해 지켜야 할 최소한의 원칙을 제시한다. 특히 압도·강요 금지, 논쟁성, 학생의 이해관계 분석과 자기 판단 능력 함양이라는 세 원칙은 학교에서 논쟁적 쟁점을 다루는 중요한 기준으로 활용되고 있다. 본고에서는 보이텔스바흐 합의의 형성 배경과 주요 원칙을 살펴보고, 이러한 원칙이 학교의 민주주의교육과 정치적 쟁점 수업에서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1. 독일 민주시민교육의 사회적 합의가. 보이텔스바흐 합의의 역사적 맥락보이텔스바흐 합의는 독일 정치교육에서 널리 인정되는 핵심적인 교육 원칙으로, 1970년대 독일의 정치교육을 둘러싼 이념적·방법론적 논쟁 속에서 형성되었다. 이는 특정한 정치교육 이론에 대한 합의가 아니라,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교육이 지켜야 할 최소한의 실천적 원칙을 제시한 것이다. 독일 연방정치교육원(Bundeszentrale für politische Bildung) 역시 정치교육의 중요한 전문적 기준으로 이 합의를 참고하고 있다. 1970년대 독일에서는 정치교육의 목표와 방법을 둘러싸고 다양한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특히 정치교육이 사회의 변화를 적극적으로 추구해야 하는지, 또는 기존의 민주적 질서와 가치에 대한 이해를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놓고 논쟁이 지속되었다. 이러한 논쟁 속에서도 정치교육의 기본 원칙에 대한 전문가들의 대화는 계속되었으며, 1976년 바덴뷔르템베르크 주 정치교육원 주최로 슈베비셴 알프의 보이텔스바흐(Beutelsbach)에서 열린 회의가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당시 한스-게오르크 벨링(Hans-Georg Wehling)은 논쟁에 참여한 학자들의 공통점을 세 가지 원칙으로 정리하였고, 이것이 이후 ‘보이텔스바흐 합의’로 불리게 되었다(Bundeszentrale für politische Bildung, 2011).
나. 보이텔스바흐 합의의 원칙보이텔스바흐 합의의 세 가지 원칙은 다음과 같다. 첫째, 압도·강요 금지 원칙(Überwältigungsverbot)이다. 이 원칙은 정치교육에서 교사가 학생에게 특정한 정치적 견해나 가치관을 강요하거나 학생을 이념적으로 주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세뇌나 교화를 금지하고 학생의 자율적인 판단을 보장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둘째, 논쟁성 원칙(Kontroversitätsgebot)이다. 학문과 정치에서 논쟁적인 사안은 수업에서도 논쟁적인 사안으로 다루어야 한다. 사회에서 서로 다른 입장이 존재한다면 교사는 특정 입장만을 일방적으로 제시해서는 안 되며, 학생들이 다양한 관점과 근거를 접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셋째, 학생의 이해관계 분석 및 자기 판단 능력 함양 원칙이다. 학생은 정치적 상황에서 자신의 개인적·사회적 이해관계와 입장을 분석하고, 이를 바탕으로 독립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정치교육의 목표는 특정한 결론을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의 자율적이고 비판적인 정치적 판단 능력을 길러야 한다는 것이다(Bundeszentrale für politische Bildung, 2011). 보이텔스바흐 합의는 정치교육의 내용에 대한 ‘합의’라기보다 정치적·학문적 견해의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교육 현장에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규칙에 대한 합의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즉, 이견(Dissens)은 민주적 정치교육에서 자연스러운 것이며, 합의의 핵심은 이견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다양한 견해를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있다. 다음은 보이텔스바흐 합의의 원문이다 (Wehling, 1977).
보이텔스바흐 합의(Beutelsbacher Konsens)1. 압도·강요 금지 원칙(Überwältigungsverbot)어떠한 수단을 쓰더라도 학생에게 특정한 견해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하거나, 학생이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형성하는 것’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정치교육과 교화(Indoktrination)의 경계가 구분된다. 교화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교사가 수행해야 할 역할과,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학생의 자율적·성숙한 시민으로서의 역량(Mündigkeit)이라는 교육목표와 양립할 수 없다.
2. 학문과 정치에서 논쟁적인 것은 수업에서도 논쟁적으로 다루어야 한다.이 요구는 앞의 원칙과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서로 다른 관점이 배제되고, 선택 가능한 입장이 누락되며, 대안이 논의되지 않는다면 이는 교화로 향하는 길이 된다. 따라서 교사는 일종의 교정 기능(Korrekturfunktion)을 수행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질문할 필요가 있다. 즉, 학생들(및 정치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다른 학습자들)이 자신의 정치적·사회적 배경 때문에 낯설게 느낄 수 있는 관점과 대안을 특히 명확하게 제시할 필요가 있는지 검토해야 한다. 이 두 번째 기본 원칙을 확인하면, 교사의 개인적인 정치적 입장이나 학문적 인식론적 배경, 정치적 견해가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게 되는 이유도 분명해진다. 앞서 언급한 예를 다시 들자면, 교사가 가진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에 반대되는 다른 견해 역시 수업에서 함께 다루어지기 때문이다.
3. 학생의 정치적 상황과 자신의 이해관계를 분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학생은 정치적 상황과 자신의 이해관계를 분석하고, 자신이 처한 정치적 상황을 자신의 이해관계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필요한 수단과 방법을 탐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이러한 목표는 매우 강한 의미에서 실천적·행동적 능력(operational skills)을 강조한다. 이는 앞의 두 원칙으로부터 논리적으로 도출되는 결과이다. 이와 관련하여, 예컨대 헤르만 기제케(Herman Giesecke)와 롤프 슈미더러(Rolf Schmiederer)를 대상으로 제기되었던 ‘형식주의로의 회귀(Rückkehr zur Formalität)’라는 비판, 즉 자신의 교육 내용을 수정하지 않기 위해 형식적인 능력만을 강조한다는 비판은 적절하지 않다. 여기서 추구하는 것은 최대 합의(Maximalkonsens)가 아니라 최소 합의(Minimalkonsens)이기 때문이다.
2. 학교에서 보이텔스바흐 합의가 작동하는 방식가. 민주주의 교육의 목표와 원칙독일 기본법의 보장하는 기본권은 단순히 국가의 자의적인 권력 행사로부터 시민을 보호하는 방어적 권리에 그치지 않는다. 독일 연방헌법재판소의 판례에 따르면 기본권에는 동시에 객관적인 가치질서(objektive Wertordnung)도 담겨 있다. 그 가운데 인간의 존엄성은 기본법이 가장 중요하게 보호하는 가치이다. 인간의 존엄성은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사람에게 인정되며 침해될 수 없다. 따라서 학교는 가치중립적인 공간이 아니다.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적 행위는 기본법의 기본권과 인권에서 도출되는 민주적 가치와 태도에 의해 뒷받침되어야 한다. 특히 나치의 인류범죄와 그 결과에 대한 역사적 성찰을 바탕으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핵심에는 다음과 같은 가치가 포함된다(Kultusministerkonferenz, 2009). - 인간 존엄성의 불가침
- 인권과 아동권리의 존중
- 인격의 자유로운 발전에 대한 권리
- 종교와 양심의 자유
- 성별·출신·종교·장애·성적 지향 등에 관계없이 법과 사회제도 앞에서 모든 사람의 평등
- 보통·자유·평등·비밀선거의 원칙
- 소수자 보호
- 표현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
- 독립된 사법부
- 권력분립
- 정치적 다원주의
- 정부와 야당 사이의 상호 견제
- 국가의 폭력 독점
- 종합적으로 말하면 권력분립의 원칙에 기초한 민주적 법치국가
자유민주주의는 국가의 제도만으로 유지될 수 없으며, 시민들이 민주주의에 대한 자신의 확신에 따라 자발적으로 민주주의의 원칙에 맞게 행동해야 한다. 따라서 역사·정치적 판단능력과 민주적 태도 및 행동능력은 지속적으로 함양하고 연습해야할 핵심역량이다. 이러한 교육은 학교생활의 다양한 영역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학교교육은 학생들에게 필요한 지식을 제공하고, 가치관과 참여를 촉진하며, 국가와 사회에서 책임을 맡고 참여하고자 하는 의지를 갖도록 격려하고 그 능력을 길러주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학교는 수업뿐만 아니라 비교과 활동에서도 학생들이 실제로 행동하고 판단할 수 있는 다양한 학습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즉, 민주주의를 실제로 경험하고 실천하는 것이 학교의 중요한 질적 기준이 되어야 한다.
나. 보이텔스바흐 합의의 학교 현장 적용민주적 학습의 핵심적인 기반 가운데 하나는 보이텔스바흐 합의를 학교 현장에서 실제로 적용하는 것이다. 보이텔스바흐 합의는 교사가 정치적 쟁점에 대해 아무런 입장도 취하지 않는다는 의미의 중립성(Neutralität)을 의미하지 않는다. 핵심은 교사의 정치적 의견 표명 자체를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의 판단 형성을 압도하거나 특정 정치적 견해를 강요하지 않는 것이다. 동시에 실제 사회와 학문에서 논쟁적인 사안은 교실에서도 논쟁적으로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교사는 특정한 입장을 정답으로 제시하기보다, 서로 다른 입장과 그 근거를 학생들이 함께 살펴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교사가 학생의 동의 여부와 관계없이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권위적으로 전달하거나, 특정 입장을 도덕적으로 우월한 것으로 제시하여 학생에게 사실상 선택을 강요하는 것은 문제가 된다. 보이텔스바흐 합의에 따라 학교에서 학생을 단순히 교사가 전달하는 정치적 가치의 수용자로 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주체로 본다. 교육의 목표는 학생이 교사의 생각을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학생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학생에게 질문하고,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게 하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게 하며, 자신의 판단을 수정하거나 발전시킬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또한 논쟁성 원칙에 따라 학교 수업에서 교사가 자신의 판단에 따라 논쟁을 종결시켜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정치적으로 논쟁적인 주제라면, 서로 다른 정치적 입장, 서로 다른 사회적 이해관계, 서로 다른 학문적 해석, 찬성과 반대의 논거 등을 학생들이 접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만약 논쟁적인 문제를 하나의 정답으로 가르친다면 학생에게 특정 판단을 강요할 가능성이 높아지며, 학생의 독립적 판단을 방해하고, 주입·교화의 위험이 높아진다. 그러나 모든 의견을 똑같이 인정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동시에 강조된다. 논쟁성이 가치중립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교사는 논쟁적인 주제를 여러 관점에서 제시해야 하지만, 인권과 민주주의의 기본원칙을 침해하는 주장까지 아무런 비판 없이 동등하게 인정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학생이 “특정 인종의 사람들은 열등하므로 차별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교사는 “이것도 하나의 의견이니 존중해야 한다.”고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 주장은 인간의 존엄성, 평등, 인권이라는 민주주의의 기본원칙과 충돌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사는 그 주장을 그대로 방치해서는 안 되고, 왜 문제가 되는지 설명하고, 인권과 기본권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다른 관점을 제시하고, 민주주의와 법치국가의 경계를 명확하게 해야 한다(Kultusministerkonferenz, 2009). 따라서 보이텔스바흐 합의를 수업에 적용할 때 교사의 역할은 중립적 관찰자가 아니다. 독일 교육은 교사에게 다양한 관점에서 주제를 조명하고, 토론을 진행·조정하며, 필요하면 개입하고, 한계를 넘어서는 경우 그 경계를 명확하게 제시하는 역할을 요구한다. 예를 들어, 이민/난민 문제를 주제로 다룰 때, 교사가 “난민을 받아들이는 것은 무조건 옳다.”고 가르치면 주입식 교육 금지에 위배될 수 있다. 반대로, “난민을 받아들이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가르쳐도 마찬가지이다. 대신, 인도주의적 관점, 국가의 수용능력, 사회통합, 재정적 부담, 안보 문제, 국제법, 난민의 권리 등 다양한 관점을 제시하고 학생들이 근거를 비교하도록 한다. 다만 인간의 존엄성과 기본권 자체를 부정하는 주장에 대해서는 교사가 명확하게 개입해야 한다.
3. 마치며독일의 민주시민교육은 특정한 정치적 가치나 이념에 대한 합의를 전제로 하기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교육이 지켜야 할 최소한의 원칙에 대한 합의를 토대로 발전해 왔다. 그 핵심에는 보이텔스바흐 합의의 ‘압도·강요 금지’, ‘논쟁성’, ‘학생의 이해관계 분석과 자기 판단 능력 함양’이 자리하고 있다. 특히 이 합의는 정치적·사회적 쟁점에 대한 의견의 일치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견과 논쟁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학생이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조건을 보장하는 것에 의미가 있다. 동시에 독일의 사례는 민주시민교육이 가치중립적인 교육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학교는 인간의 존엄성, 인권, 평등, 자유, 민주주의와 법치주의 등 헌법적 기본가치를 토대로 운영되며, 이러한 가치를 침해하는 주장에 대해서는 교사가 교육적으로 개입할 수 있다. 따라서 독일의 민주시민교육에서 교사의 역할은 정치적 중립을 이유로 논쟁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관점을 공정하게 제시하고 토론을 조정하면서도 민주주의와 인권의 헌법적 경계를 분명히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독일의 경험은 우리나라 민주시민교육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특히 정치적 양극화와 사회적 갈등이 학교 현장으로 유입되는 상황에서 민주시민교육의 핵심은 특정한 정치적 입장을 전달하는 데 있지 않으며, 학생이 서로 다른 주장과 근거를 비교·검토하고 자신의 판단을 형성할 수 있는 교육환경을 마련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서는 교사의 정치적 중립을 단순히 정치적 의견의 비표명으로 이해하기보다, 주입과 강요를 방지하면서도 헌법적 가치에 기반하여 논쟁을 교육적으로 다룰 수 있는 전문적 역량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나아가 민주시민교육을 별도의 프로그램이나 특정 교과에 한정하기보다, 수업과 학교생활 전반에서 민주적 의사결정과 토론, 참여를 실제로 경험하는 과정으로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결국 독일 사례의 핵심적인 시사점은 민주주의를 가르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학생이 민주주의의 원칙에 따라 생각하고 토론하고 참여하는 경험 자체를 학교교육의 중요한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점에 있다.
|